2025.01.22 - 202.01.24
🔖 72p
손목은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아픈 건 가슴이야. 뭔가가 명치에 걸려 있어. 그게 뭔지 몰라. 언제나 그게 거기 멈춰 있어. 이젠 브래지어를 하지 않아도 덩어리가 느껴져. 아무리 길게 숨을 내쉬어도 가슴이 시원하지 않아.
어떤 고함이, 울부짖음이 겹겹이 뭉쳐져, 거기 박혀 있어. 고기 때문이야.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 그 목숨들이 고스란히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거야. 틀림없어. 피와 살은 모두 소화돼 몸 구석구석으로 흩어지고, 찌꺼기는 배설됐지만, 목숨들만은 끈질기게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 거야.
한번만, 단 한번만 크게 소리치고 싶어. 캄캄한 창밖으로 달려나가고 싶어. 그러면 이 덩어리가 몸 밖으로 뛰쳐나갈까. 그럴 수 있을까.
아무도 날 도울 수 없어.
아무도 날 살릴 수 없어.
아무도 날 숨쉬게 할 수 없어.
🔖 98p
그는 문득 구역질이 났는데, 그 이미지들에 대한 미움과 환멸과 고통을 느꼈던, 동시에 그 감정들의 밑바닥을 직시해내기 위해 밤낮으로 씨름했던 작업의 순간들이 일종의 폭력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갑자기 그의 정신은 경계를 넘어, 거칠게 운전 중인 택시 문을 열고 아스팔트 바닥을 구르고 싶어졌다. 그는 더이상 그 현실의 이미지들을 견딜 수 없었다. 다시 말해, 그것들을 다룰 수 있었을 때 그는 충분히 그것들을 미워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 101p
그를 당혹스럽게 한 것은, 그의 동서가 마치 망가진 시계나 가전제품을 버리는 것처럼 당연한 태도로 처제를 버리고자 했다는 것이다.
🔖 124p
그제야 그는 처음 그녀가 시트 위에 엎드렸을 때에 그를 충격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모든 욕망이 배제된 육체, 그것이 젊은 여자의 아름다운 육체라는 모순, 그 모순에서 배어나오는 기이한 덧없음, 단지 덧없음이 아닌, 힘이 있는 덧없음. 넓은 창으로 모래알처럼 부서져내리는 햇빛과, 눈에 보이진 않으나 역시 모래알처럼 끊임없이 부서져내리고 있는 육체의 아름다움⋯⋯ 몇마디로 형용할 수 없는 그 감정들이 동시에 밀려와, 지난 일년간 집요하게 그를 괴롭혔던 성욕조차 누그러뜨렸던 것이다.
🔖 143p
차라리 아내가 다른 아내들처럼 소리치고 화를 낸다면, 잔소리를 하고 악담을 퍼붓는다면 마음이 편할 것이다. 이토록 쉽게 체념하고, 그 체념의 앙금이 우울함으로 가라앉는 아내의 성격이 그를 숨막히게 했다. 그것이 아내의 선하고 약한 면임을,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임을 모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자신이 자기중심적이고 무책임한 것임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아내의 인내와 선의가 숨막힌다고, 그래서 더더욱 자신이 나쁜 쪽이 되어가는 거라고 강변하고 싶었다.
🔖 180p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김 서린 차창을 닦는다. 오랫동안 혼자여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한 시선으로, 차창을 두드리는 세찬 빗줄기를 바라본다. 마석음을 벗어나자 늦은 유월의 숲이 도로변으로 펼쳐진다.
🔖 189p
그때 영혜의 입가에 어린 조용한 미소는 어쩐지 낯설어 보였다. 마치, 그녀가 영혜를 낯설게 느끼는 것만큼이나 영혜 역시 그녀를 낯설게 느끼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았다. 침착하다는 인상을 넘어 거의 적막하게 느껴지는 그 얼굴 앞에서 그녀는 대답을 잃었다. 그것은 남편의 우울한 태도와는 전혀 닮은 데가 없었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동일하게 그녀를 좌절하게 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 다 비슷하게 말수가 적어서였을까.
🔖 192p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한가지 사실을 깨달았는데, 그녀가 간절히 쉬게 해주고 싶었던 사람은 그가 아니라 그녀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열아홉살에 집을 떠난 뒤 누구의 힘도 빌지 않고 서울생활을 헤쳐나온 자신의 뒷모습을, 지친 그를 통해 그저 비춰보았던 것뿐 아닐까.
🔖 200p
그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었을까. 그의 행동을 미리 예측할 만한 단서를 놓친 적은 없었을까. 영혜가 아직 약을 먹는 환자라는 사실을 그에게 더 강하게 인식시킬수는 없었을까.
🔖 208p
그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의사에게 표했던 재발에 대한 우려는 단지 표면적인 이유이며, 영혜를 가까이 둔다는 사실 자체가 불가능하게 느껴졌다는 것을. 그애가 상기시키는 모든 것을 견딜 수 없었다는 것을. 사실은, 그애를 은밀히 미워했다는 것을. 이 진창의 삶을 그녀에게 남겨두고 혼자서 경계 저편으로 건너간 동생의 정신을, 그 무책임을 용서할 수 없었다는 것을.
🔖 237p
문득 이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에 그녀는 놀랐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전의 어린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선량한 인간임을 믿었으며, 그 믿음대로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성실했고, 나름대로 성공했으며,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후락한 가건물과 옷자락 풀들 앞에서 그녀는 단 한번도 살아본 적 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 241p
둥글게 돌고 있는 시계 초침을 눈으로 따라가며 호흡을 진정시키려 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문득 그녀는 이 순간을 수없이 겪은 듯한 기시감을 느겼다. 고통에 찬 확신이 마치 오래 준비된 것처럼,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녀의 앞에 놓여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
더이상은 견딜 수 없다.
더 앞으로 갈 수 없다.
가고 싶지 않다.
그녀는 다시 한번 집 안의 물건들을 둘러보았다. 그것들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던 것과 꼭 같았다.
🔖 266p
그녀는 설명할 수 없었다. 어떻게 자신이 그렇듯 쉽게 아이를 버리려 할 수 있었는지. 자신에게도 납득시킬 수 없을 잔인한 무책임의 죄였으므로, 누군가에게 고백할 수도, 용서를 구할 수도 없다. 다만 소름끼칠 만큼 담담한 진실의 감각으로 느낄 뿐이다. 그와 영혜가 그렇게 경계를 뚫고 달려나가지 않았다면, 모든 것을 모래산처럼 허물어뜨리지 않았다면, 무너졌을 사람은 바로 그녀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다시 무너졌다면 돌아오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그렇다면, 오늘 영혜가 토한 피는 그녀의 가슴에서 터져나왔어야 할 피일까.
📌
너무 당연한 이야기지만 놓치고 있었던, 각각의 사람들마다 자신들의 공간에 쌓아올려진 것들이 자신을 결정한다는 사실.
삶의 가치든, 고통이든, 행복이든. 어쩌면 태어나고 자라면서 자신도 모르게 만들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이 만든 개념으로 다른 사람을 규정짓는 것은 상대에게 큰 상처가 된다. 늘 조심해야 한다.
세상 밖으로 벗어나고 싶을 만큼 힘든데 그것을 참아내는 사람이 있고 참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참아내는 사람도 그 속에서는 참지 못할 수도 있다.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인혜한테는 아들인 것처럼 나를 이 세상 속에서 살게끔 하는 동기는 무엇일까. 아직 나는 잘 모르겠다.
고통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것일까. 어떻게 치유해야 할까. 그들의 속사정을 알아버린 나는 강렬히 비난을 할 수 없었다. 참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모든 개인의 욕망을, 욕구를 표출할 수 없으므로 제도와 윤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참 어려운 책이다.